가끔 이유 없이 불안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별다른 사건이 없었는데도 마음이 조용히 흔들리고, 모든 것이 멀게 느껴집니다. 해야 할 일은 쌓여 있지만 손이 가지 않고,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워지는 날들.
예전엔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 애썼습니다. 무작정 움직이고, 바쁜 척을 하며 감정을 덮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럴 땐 조용히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좋아하는 찻잎을 꺼내 한 잔의 차를 우립니다. 물이 끓는 소리, 향이 퍼지는 순간, 마음은 잠시 멈추고 다시 숨을 쉽니다.
이 글은 불안한 날마다 차를 끓이며 조금씩 회복해온 저의 이야기입니다.
1. 불안을 인정하고 멈춰 서는 순간
불안은 대개 이유 없이 찾아옵니다. 일상 속 평온한 순간에도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고,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마음이 무겁고 조급해집니다. 저는 한동안 그 감정을 없애려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괜찮은 척 웃고, 일로 덮으며 바쁘게 움직였죠. 하지만 불안은 억지로 밀어낸다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면할수록 더 짙게,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태도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불안한 감정이 올라오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를 묻기보단, ‘아, 지금 내가 불안하구나’ 하고 인정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내 약한 부분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복하다 보니 마음속 저항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켠에 작은 공간이 생겼습니다.
그 공간에서 저는 스스로를 다그치기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하게 되었습니다. ‘불안해도 괜찮아, 지금은 그냥 이렇게 머물어도 돼’라는 마음으로, 잠시 모든 걸 멈추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길지 않아도 불안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나를 괴롭히던 감정이 아니라 나를 돌보게 해주는 감정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을 인정하고 멈춰 서는 것은 약한 태도가 아니라 나를 돌보는 시작입니다.
2. 차를 끓이는 시간은 나를 돌보는 의식
불안이 몰려오는 날이면 저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합니다. 찻잎을 꺼내고, 주전자에 물을 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느새 하나의 작은 의식처럼 굳어졌습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동이지만, 그 안에는 나를 위로하고 안정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이 손끝의 감각에 집중되면서 점점 줄어들고, 복잡했던 마음은 찻물이 끓는 소리 속에서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차를 끓인다는 것은 단순히 마시기 위한 준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시간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만을 위해 찻잎을 고르고, 뜨거운 물을 따르고, 향기를 맡고, 잔을 손에 쥐는 이 과정은 나를 향한 작고 확실한 배려입니다. 그 시간이 길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단 몇 분이라도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달라집니다.
특별한 차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때론 허브차, 때론 녹차, 가끔은 레몬조각을 넣은 따뜻한 물 한 잔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차냐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며 보내는 시간입니다. 차를 끓이면서 저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됩니다. 해야 할 일도, 걱정도 잠시 내려놓고, 오직 나를 위한 작은 루틴 속에서 마음을 쉬게 합니다. 차를 끓이는 시간은 그렇게 하루의 불안을 눌러주고, 나아갈 힘을 채워주는 고요한 의식이 됩니다.
3. 향기와 온기가 마음에 말을 걸어올 때
차를 마시는 그 순간은 단순히 따뜻한 음료를 마시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달래주는 특별한 위로의 시간입니다. 찻잔에서 퍼지는 향기는 코끝을 간질이며 감정을 자극하고, 손에 닿는 온기는 내면 깊숙한 곳까지 따스함을 전달합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나의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쁘게 흘러가던 생각들이 잠시 멈추고, 마음속 조용한 공간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목소리는 말없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도 잘하고 있어. 너는 충분히 괜찮아.”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주는 그 말은, 차 한 잔이 전하는 따뜻함을 통해 도달합니다. 사람의 말보다 더 깊고 진한 위로는, 바로 이런 조용한 순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차의 향기는 기억을 불러오고, 차의 온기는 나를 이 순간에 머무르게 합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던 생강차 향이 떠오르기도 하고, 혼자 다녀온 여행지의 찻집에서 마신 홍차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런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마음은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면 불안했던 감정도 어느새 조금은 작아진 듯 느껴집니다. 향기와 온기가 마음에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나를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차 한 잔이 전해주는 조용한 기적입니다.
불안한 날, 차 한 잔은 삶을 완전히 바꾸진 않지만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그 따뜻한 시간은 나를 위한 쉼표이자, 하루를 감당할 작은 여유입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맞춰 살아가지만, 하루 중 몇 분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 하루는 분명 달라집니다.
지금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조용히 주방으로 가보세요. 찻잎을 꺼내고 물을 데우고, 차를 따르며 숨을 고르세요. 그 시간 동안 당신의 마음도 천천히 따뜻해질 것입니다.
차 한 잔이 주는 위로는 작지만 깊습니다. 그리고 그 깊이는 당신의 하루를 충분히 감싸줄 수 있습니다.